로즈데이
세상에는 별의별 ‘데이’가 다 있다.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야 워낙 유명-사실 어느 날이 남성이 여성에게 선물을 주는 날인지 알게된 것도 최근의 일이지만-하지만, 세상에 로즈데이까지 있을 줄이야. 유난히 길가는데 꽃을 든 사람들이 많길래 스승의 날을 앞두고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에 꽃을 들고 다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다 동창이 아니고 연인이었던거다…
내가 교제중인 여성은 뭐라고 할까 아주 예쁘지는 않은데, 하도 표정이 밝아서 실제보다 조금 더 예뻐보이는 그런 여성이다. 성격은 시크한듯 무심하기 이를데 없어서, 둘 중 한 명이 바쁘면 당연히 안 만난다고 생각하고, 본인이 졸리면 주말에도 날 안 만나고 그냥 잔다. 나는 다시 내가 이성교제를 한다면 반드시 상대방과 민주적인 관계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곤 했는데, 이 여성은 시크한듯 무심하지만 일단 만나면 한없이 착해지는 관계로 항상 내 의사에 의해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 아직까진 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궁지에 몰린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것은 바로 로즈데이. 두둥!
어젯밤, 회사 근처에서 친한 입사동기 두 명과 열심히 술을 마시다가 굿나잇 전화를 했다. 갑자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냐고 묻는 것이다. 순간 비상벨이 울리는 듯한 환각을 경험하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우리가 교제를 시작하게 된 것이 화이트데이니까, 나는 대답했다. “우리 사귄지 두 달? 그거 아님 잘 모르겠는데…” 이내 실망한 애인의 한 마디. “로즈데이 몰라요?” 정말이지 나는 목요일은 로즈데이가 아니라 웬즈데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아는 웬즈데이는 프라이데이를 물리치고 최근 음주데이의 최고봉을 달리고 있는 날이다. 그래서, 난 동기들과 술을 마셨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의견은 내 머릿속에서 이미 기각되었고, 어떻게 장미꽃 한 송이 줄 생각도 안 하고 동기들과 술을 마시고 있냐는 힐난이 이어졌다. 일단은 잘 무마하고 끊었다.
우리의 데이트 약속은 웬즈데이로즈데이가 아니라 프라이데이였다. 바로 오늘! 생일선물로는 줘 봤어도 생화를 이성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준 적은 내 인생에서 아직까지 한 번도 없는데, 장미꽃을 살 생각을 하니 약간 우울해졌다. 애인에게 그깟 꽃다발 하나 주는 게 어려워서는 아니다. 예로부터 花無十日紅이라 하지 않았던가. 열흘 동안 붉은 꽃이 없듯이, 아무리 성한 것이라 할 지라도 이내 쇠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연애 또한 마찬가지일 수 있는데, 꽃을 선물로 주는 것이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백화점에 들러 장미차를 사서 포장을 했다. 다음 주에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숙취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에 함께 가자고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1집 보편적인 노래 앨범을 샀다.
두 개의 선물을 받아든 그녀는 무척 좋아했고, 웬즈데이 아니 로즈데이에 있었던 내 연애 첫 위기는 무사히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샤브샤브를 먹고 인사동 스캔들을 봤고, 영화는 애인과 함께 보기에는 적당히 좋았다. 코엑스를 나오자마자 그녀는 마을버스가 왔다며 황급히 뛰어갔고, 나는 주말 잘 보내라고 인사를 했다. 이번 주말에도 그녀는 잠을 자고 싶겠지만, 귀하신 몸을 이끌고 일요일에 나를 만나주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주 금요일에는 나와 함께 브로콜리 너마저의 공연에 가기로 했다. 비가 추적추적 오지만, 귀가길은 간만에 편안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로즈데이가 야기했던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들을 겪게 될테고, 급기야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일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왠지 잘 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2009년의 봄은 오늘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