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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에피소드

October 3rd, 2009 5 comments

이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께서 풍성한 한가위를 보내고 계시길 기원합니다. 저의 풍성한 한가위를 위해 댓글이라도 하나 남겨주시면 무료한 한가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나.
노환으로 재택생활이 어려우셔서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10여 년전 연락이 두절되어 사실상 연이 끊겼던 작은 고모가 어떻게 소식을 들으셨는지 집에 오셨다. 우리 할머니는 대왕할머니, 고모도 이제 할머니.

고모 : 자네도 앉아서 같이 먹게.
엄마 : 형님 저희 요새 형편이 어려워져서 여자들은 저녁 안 먹고, 남자들만 저녁 먹어요.
고모 : 다이어트가 아니고? 자네 여전히 썰렁하구만.

참고로 우리 고모는 칠순이 가까워오는 나이에도 인터넷동호회와 블로그의 20~30대 친구들과 놀러다니는 신세대시다.

두울.
저녁을 먹고 있는데, 내가 게장을 해체할 가위 등등이 필요하여 부엌에 몇 번 왔다갔다 했다.

할머니 : 사나가 자꾸 글카면 불알 떨어진다.
아버지 : 엄마, 요새는요 세상이 바뀌어서 남자들도 부엌 들어가야 되요. 엄마 말대로면 요즘에는 온 집안이랑 길거리에 불알이 하도 많이 떨어져서 있어서 다닐 수가 없어요.
고모 : ㅋㅋㅋ
동생, 아빠 : …
나 : (남은 밥을 한 번에 입에 넣고 방으로 피신)
할머니 : (욕 시작)

로즈데이

May 16th, 2009 5 comments

세상에는 별의별 ‘데이’가 다 있다.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야 워낙 유명-사실 어느 날이 남성이 여성에게 선물을 주는 날인지 알게된 것도 최근의 일이지만-하지만, 세상에 로즈데이까지 있을 줄이야. 유난히 길가는데 꽃을 든 사람들이 많길래 스승의 날을 앞두고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에 꽃을 들고 다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다 동창이 아니고 연인이었던거다…

내가 교제중인 여성은 뭐라고 할까 아주 예쁘지는 않은데, 하도 표정이 밝아서 실제보다 조금 더 예뻐보이는 그런 여성이다. 성격은 시크한듯 무심하기 이를데 없어서, 둘 중 한 명이 바쁘면 당연히 안 만난다고 생각하고, 본인이 졸리면 주말에도 날 안 만나고 그냥 잔다. 나는 다시 내가 이성교제를 한다면 반드시 상대방과 민주적인 관계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곤 했는데, 이 여성은 시크한듯 무심하지만 일단 만나면 한없이 착해지는 관계로 항상 내 의사에 의해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 아직까진 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궁지에 몰린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것은 바로 로즈데이. 두둥!

어젯밤, 회사 근처에서 친한 입사동기 두 명과 열심히 술을 마시다가 굿나잇 전화를 했다. 갑자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냐고 묻는 것이다. 순간 비상벨이 울리는 듯한 환각을 경험하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우리가 교제를 시작하게 된 것이 화이트데이니까, 나는 대답했다. “우리 사귄지 두 달? 그거 아님 잘 모르겠는데…” 이내 실망한 애인의 한 마디. “로즈데이 몰라요?” 정말이지 나는 목요일은 로즈데이가 아니라 웬즈데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아는 웬즈데이는 프라이데이를 물리치고 최근 음주데이의 최고봉을 달리고 있는 날이다. 그래서, 난 동기들과 술을 마셨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의견은 내 머릿속에서 이미 기각되었고, 어떻게 장미꽃 한 송이 줄 생각도 안 하고 동기들과 술을 마시고 있냐는 힐난이 이어졌다. 일단은 잘 무마하고 끊었다.

우리의 데이트 약속은 웬즈데이로즈데이가 아니라 프라이데이였다. 바로 오늘! 생일선물로는 줘 봤어도 생화를 이성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준 적은 내 인생에서 아직까지 한 번도 없는데, 장미꽃을 살 생각을 하니 약간 우울해졌다. 애인에게 그깟 꽃다발 하나 주는 게 어려워서는 아니다. 예로부터 花無十日紅이라 하지 않았던가. 열흘 동안 붉은 꽃이 없듯이, 아무리 성한 것이라 할 지라도 이내 쇠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연애 또한 마찬가지일 수 있는데, 꽃을 선물로 주는 것이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백화점에 들러 장미차를 사서 포장을 했다. 다음 주에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숙취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에 함께 가자고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1집 보편적인 노래 앨범을 샀다.

두 개의 선물을 받아든 그녀는 무척 좋아했고, 웬즈데이 아니 로즈데이에 있었던 내 연애 첫 위기는 무사히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샤브샤브를 먹고 인사동 스캔들을 봤고, 영화는 애인과 함께 보기에는 적당히 좋았다. 코엑스를 나오자마자 그녀는 마을버스가 왔다며 황급히 뛰어갔고, 나는 주말 잘 보내라고 인사를 했다. 이번 주말에도 그녀는 잠을 자고 싶겠지만, 귀하신 몸을 이끌고 일요일에 나를 만나주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주 금요일에는 나와 함께 브로콜리 너마저의 공연에 가기로 했다. 비가 추적추적 오지만, 귀가길은 간만에 편안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로즈데이가 야기했던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들을 겪게 될테고, 급기야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일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왠지 잘 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2009년의 봄은 오늘부터 시작되었다.

별 헤던 낮

January 25th, 2009 4 comments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글을 보다가 떠 오른 신입사원 시절의 어느 하루.
싸이월드에 적었던 것을 블로그에 옮긴다.

———-

3일 연속 회식을 했다. 명목은 모두, 환송회.
우리가 연수원으로 돌아가서 아쉬운 것…

은 절대 아니다. 우리는 단지,
회식에 이름을 부여하기 위해 소모된 것 뿐.

그러나 어제 환송회는 특이했다.
연수기간 내내 날 무척 예뻐해주신 우리 팀장님께서
저녁을 사 주신단다. 처음엔,
정말 저녁만인 줄 알았다.

동기 3명이 저녁 먹으러 한바에 간 사이에 그들을 배신하고 갔다.
회식때마다 빠지는 우리 현장 유일의 여성사원도 동행했다.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나보고 여자한테 인기가 많을 것 같단다.
생각보다
안목이 부족한 분이셨다.

버림받은 동기들과 선배기사님들은,
소주를 먹으러 갔다고 한다.

어제 회식장소는 나의 상상을 벗어난 곳이었다.
젊은 사원들의 ‘멋진 팀장’이 될 수 있다는 그 전설의 회식장소.
건설회사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향과도 같은 곳. 자그마치,

베니건스.

조낸,
맛있었다.

바베큐폭립, 코코 쉬림프, 버팔로 앤 비욘드 윙, 오리엔탈 치킨 샐러드, 스파게티 프리마베라, 아이다호 치즈 후라이… 그리고
시원한 맥주,

한잔.

두잔.
세잔.
네잔.
다섯잔.
여섯잔.
일곱잔.
여덟잔.
아홉잔.
…..
….

..
.

그 뒤는 차마 세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베니건스는 절대,
호프집이 아니다.

2차에서는 버림받았던 동기들과 선배기사님들이 합류했다. 다행히 소주가 아니라 맥주였다. 종종 ‘알박이’라고 불리는 소주+맥주 폭탄주도 제조되었다. 그러나 맥주는 맥주다. 그래서,

빨대로 마셨다.

블루칼라 십여명이 나란히
빨대로 맥주를 마시는 모습은
하늘 위에서 본 그랜드캐년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장관이었다. 어쩌면,
가관이었다.

알고보니 1,2차가 맥주였던 것은 여성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성분께서,

귀가하셨다. 그래,
이제 소주다.

                     잔이,
돌기 시작한다. 나도,
돌기 시작한다.

4차는 양주였다.
드라마에서 양주를 마시는 장면을 촬영할 때
보리차를 쓴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머리는 양주라고 말하지만 혀는

‘보리차다.’

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건설업계에는
‘현장에 남기는 것은 발자국뿐이고, 가져가는 것은 추억뿐이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5주 동안 내가 갈무리한 추억만큼
5주 동안 내가 갈무리한 알코올이

속을 휘젓는다.

별 헤는 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