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February, 2005

Apologies Accepted

Monday, February 28th, 2005

지금은 지우고 없지만, MT를 잠깐 쓸 때 http://www.sorryeverybody.com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었다. 미국 대선 직후에 만들어진 이 사이트에는 부시의 재선을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메시지들이 게시되어 있다. 이런저런 지적들에도 불구하고, 진심이 엿보이는 표정과 눈빛 덕에 불쾌와 유쾌를 믹스시킨 감정을 선사했었는데 나름 성공했나보다. 책도 내고.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미국인들의 이런 사과에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이 사이트에는 전 세계에서 보내온 메시지가 올라와 있다. 가끔씩 'From Korea'도 구경할 수 있고. 특히나, 북한과 싸우면 안 되기 때문에 용서한다는 군인의 메시지는 압권이다. –; 감동적인 메시지도 몇 개 있긴 하지만, 죽은 사람은 용서해 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사이트가 예뻐보이지는 않는다.

We made the same mistake 50 years ago.

한심해

Saturday, February 26th, 2005

내일 있을 2월달 토익 신청을 12월에 해 놓았다가 알고 있었는데, 접수가 안 되어있다. 엄마는 당신이 보기에 답답했던 내 행동들에 대해 큰 소리로 야단을 치셨다. 뭐라고 변명하고 싶은?변명할 말이 없었다.

어젯밤에 대학 동기가 크라잉넛 콘서트 표가 생겼다고 같이 가자고 했었다. 오늘 약속이 있어서 아쉽지만, 못 간다고 했다. 그 약속 깨졌다. 집에서 혼자서 찬 밥을 먹으며 TV를 보는데, 오늘 하루 뭐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익같은 거 어차피 다음에 보면 된다. 자의도 아닌 타의로 약속이 한 번 깨졌다고 내 스케줄 관리를 반성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오늘 밤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이건 자유롭게 산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나사가 풀린 듯한 느낌이다.

한심해.

키르케의 돼지

Thursday, February 24th, 2005

신들의 계보를 노래하고 있는『신통기』에 따르면 키르케는 태양신 헬리오스와 오케아노스의 딸인 페르세이스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키르케는 『오뒤세이아』의 10권에 등장하는데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은 오뒤세우스가 키르케에 의해 돼지로 변한 부하들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린다. 그 후 오뒤세우스는 키르케의 섬에서 1년간 머물며 아이들을 낳고, 섬을 떠날 때 키르케는 그에게 세이렌을 비롯한 이후의 장애물들에 대해 몇 가지 조언을 해 준다.

Circe

Circe
Wright Barker, ca.1900

도정일 선생은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에서 키르케의 마법에 걸린 오뒤세우스의 동료들을 모티프로 기억과 망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몸은 돼지로 바뀌었지만 정신은 인간의 것으로 남아있는 '키르케의 돼지'들은 비동일성과 분열의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구원받기 위한 전제조건인 '기억의 고통'과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구원받는 '망각의 즐거움'을 대비시키며 후기산업사회에서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도정일 선생에 따르면, '우리는 아직도 그녀의 마법에 걸려 있다.'

대학에 온 뒤로, 나 역시 가슴이 아프거나 잊고픈 기억이 있으면 종종 '키르케의 돼지'가 되어 왔다. 그것이 버릇이 되어 아무 일 없을 때에도 나는 자주 돼지가 된다. 어려운 방법은 아니고, 단지 마법의 약을 조금만 마시면 된다. 동료들과 꿀꿀대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돼지가 되어버린 몸은 고통스럽고, 머리는 다소 아프긴 하지만 적어도 기억은 모두 소멸되어 버린다. 고통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망각하는 것은 본질적이지는 않더라도 구원에 이르는 가장 손쉬운 방법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손쉬운 구원을 택하곤 하던 나쁜 버릇을 이제는 거의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기를 먹지 않게 되면서 의도하지 않게 돼지가 되는 일이 다시 많아졌다. 고기가 포함되지 않는 술안주는 거의 없는지라, 빈 속에 술을 마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 나는 술자리에서의 대화는 커녕 MSN대화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단지 내 주량의 반 정도를 마셨을 뿐인데. 그래서 일요일에는 돼지고기와 조개를 빼달라고 한, 정말로 김치 밖에 없는 김치찌개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같이 마신 친구에게 정말로 미안했다. 사실, 그냥 고기를 먹은 뒤에 '키르케의 돼지'가 되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술을 마실 때마다 육식의 유혹이 드는 마당에서 아주 좋은 핑계가 아닌가? –;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는 나 스스로를 이번엔 어떤 방식으로 구원할 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동안처럼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것은 지양하고 싶은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