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Vegetarian Project’ Category

삼겹살에 굴복하다.

Tuesday, March 15th, 2005

지난 12일은 레오의 생일모임에 갔었다. 1차는 삼겹살 및 항정살과 소주였다. 그냥 약속도 아니고 생일인데다가 그냥 된장찌개나 시키면 되겠거니 하고 고깃집에 갔다. 하지만, ‘삼겹살에 소주’를 결국 먹지 못하고 채식을 시작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50일간의 채식이 불판에서 흘러내리는 돼지고기 기름과 함께 사라졌다. 흑.

키르케의 돼지

Thursday, February 24th, 2005

신들의 계보를 노래하고 있는『신통기』에 따르면 키르케는 태양신 헬리오스와 오케아노스의 딸인 페르세이스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키르케는 『오뒤세이아』의 10권에 등장하는데 헤르메스의 도움을 받은 오뒤세우스가 키르케에 의해 돼지로 변한 부하들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린다. 그 후 오뒤세우스는 키르케의 섬에서 1년간 머물며 아이들을 낳고, 섬을 떠날 때 키르케는 그에게 세이렌을 비롯한 이후의 장애물들에 대해 몇 가지 조언을 해 준다.

Circe

Circe
Wright Barker, ca.1900

도정일 선생은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에서 키르케의 마법에 걸린 오뒤세우스의 동료들을 모티프로 기억과 망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몸은 돼지로 바뀌었지만 정신은 인간의 것으로 남아있는 '키르케의 돼지'들은 비동일성과 분열의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구원받기 위한 전제조건인 '기억의 고통'과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구원받는 '망각의 즐거움'을 대비시키며 후기산업사회에서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도정일 선생에 따르면, '우리는 아직도 그녀의 마법에 걸려 있다.'

대학에 온 뒤로, 나 역시 가슴이 아프거나 잊고픈 기억이 있으면 종종 '키르케의 돼지'가 되어 왔다. 그것이 버릇이 되어 아무 일 없을 때에도 나는 자주 돼지가 된다. 어려운 방법은 아니고, 단지 마법의 약을 조금만 마시면 된다. 동료들과 꿀꿀대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돼지가 되어버린 몸은 고통스럽고, 머리는 다소 아프긴 하지만 적어도 기억은 모두 소멸되어 버린다. 고통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망각하는 것은 본질적이지는 않더라도 구원에 이르는 가장 손쉬운 방법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손쉬운 구원을 택하곤 하던 나쁜 버릇을 이제는 거의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기를 먹지 않게 되면서 의도하지 않게 돼지가 되는 일이 다시 많아졌다. 고기가 포함되지 않는 술안주는 거의 없는지라, 빈 속에 술을 마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 나는 술자리에서의 대화는 커녕 MSN대화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단지 내 주량의 반 정도를 마셨을 뿐인데. 그래서 일요일에는 돼지고기와 조개를 빼달라고 한, 정말로 김치 밖에 없는 김치찌개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같이 마신 친구에게 정말로 미안했다. 사실, 그냥 고기를 먹은 뒤에 '키르케의 돼지'가 되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술을 마실 때마다 육식의 유혹이 드는 마당에서 아주 좋은 핑계가 아닌가? –;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는 나 스스로를 이번엔 어떤 방식으로 구원할 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동안처럼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것은 지양하고 싶은데 말이지.

언젠가는 말해야겠다.

Wednesday, February 16th, 2005

Inspired by
초희님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

어제는 오랜만에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아서 집에 놀러가서 저녁을 먹고 술도 약간 마시고 왔다. 무척 재미있는 자리였으나, 나는 정작 밥을 먹지 않았다. 호스티스에게는 그냥 밥을 먹고 왔다고 했고. 그녀가 준비한 저녁이 쇠고기가 듬뿍 들어간 카레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 온전한 베지테리안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건 내가 자립적 베지테리안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나는 아직까지 특수한 상황에서는 육식을 하고 있다. 가령, 설날 아침에 식탁에 만두국만 올라왔을 때는 만두국을 먹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집 밖에서도 '특수한 상황'을 용인하는 것은 납득하거나 될 수 없는 범위의 것인지라 집 밖에서 저녁을 먹을 경우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이 일행 중에 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지 않은 어떤 집단에서 누군가가 '나 베지테리안이야'라고 커밍아웃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반응은 두 가지 정도일 것이다. 그를 배려하거나, 대놓고 쌩까거나.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일행들이 배려해줄 때 가장 난처할 것 같다. 내가 베지테리안이라는 이유로 그/녀들의 선택을 제한할 권리가 내게 있는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초희님의 말씀처럼 지나친 것일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자기검열은 인간의 숙명인지도. 그런 의미에서 쌩까는 경우나 어제의 저녁식사는 차라리 양호한 경우다. 그냥 내가 녹색반찬들만을 골라 적게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 내게 약속이 없는 경우는 그 동안 둘 중 하나였다. 바쁘거나, 돈이 없거나. 하지만 이번 방학에는 의식적으로 약속을 만드는 것을 피하고 있다. 내가 좀 더 엄격한 베지테리안이 되고 내 자신에게 확신이 생기기 전까지 그럴 생각이다. 좀 자신이 생기면 언젠가는 초희님처럼 말해야겠다. “채식은 내가 하는 운동들 중 하나예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