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켜라!>의 계급의식
‘게으른 건지 건방진 건지 모르겠다’는 평가를 들었던 “영상예술의 이해” 기말보고서.
03년에 휴가 나왔을 때, cinemarx가 해 줬던 이야기에서 착안했다. 성적에 관계없이 감사감사!
1. 위협적인 타자, 외계인
장준환 감독의 2003년작 <지구를 지켜라!>는 언뜻 보기에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정신질환자의 복수극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관객의 예상을 배반한다. 유제화학의 강만식 사장이 안드로메다 PK-45행성의 스파이 꾸오아아떼꾹이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난다. <지구를 지켜라!>에도 드러나듯, 존재여부조차 확실하지 않은 타자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은 대개 공포를 수반한다. 또한,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Night of the Living Dead>이 그렇듯, 타자의 존재론적 공포는 정치사회적 기의들에 대한 기표이기도 하다. 외계인은 관객에게 가장 낯익은 타자이며, 지구인과 동일한 존재로 인지될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가장 완벽한 타자이다. 그래서 돈 시겔의 <신체강탈자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에서 롤랜드 에머리히의 <독립기념일 Independence Day>에 이르는 많은 영화에서 외계인은 대개 위협적인 타자로서 존재해왔다. 그렇다면 <지구를 지켜라!>의 외계인의 기표는 어떤 기의를 갖는가 혹은 타자와의 대립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2. <지구를 지켜라!>의 이항대립
소쉬르는 ‘언어 속에는 오로지 차이들만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때문에 소쉬르 이론에서의 기표/기의, 랑그/파롤, 계열체/통합체, 공시태/통시태의 이항대립과 같이 의미는 체계내에서 ‘차이’를 통해 인지된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병구-지구인’과 ‘강사장-외계인’의 기의 역시 ‘차이의 체계’를 관찰할 때 파악할 수 있다.
도입부에서 등장하는 강사장의 영상과 병구의 나레이션은 외계인/지구인의 이항대립을 제시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항대립을 통해 강사장/병구의 기의들이 속속 드러난다. 특이할만한 것은 이항대립이 제시되는 모든 신은 메츠가 분류한 그랜드 신태그마의 8가지 유형 중 ‘평행 신태그마’의 방식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과거부터 계속된 강사장/병구의 대립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었으므로 연속적이지만, ‘평행 신태그마’의 방식을 통해 제시되는 이항대립은 시공간의 구분을 해체시키고 보편적 대립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강사장/병구의 대립이 ‘한 명의 외계인/한 명의 지구인‘ 아닌 ‘전체 외계인/전체 지구인’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강사장/병구’의 대립은 또한 ‘현실/환상’, ‘비질환자/정신질환자’, ‘어른/아이’, ‘광장/밀실’과 같은 대립쌍을 통해 제시된다. 성인이 아닌 ‘아이’ 수준의 ‘환상’을 통해 구축된 병구의 세계에서 강사장은 외계인이다. 강사장은 병구의 지하 ‘밀실’로 납치당했으며, 강사장과 형사들이 보기에 병구는 ‘정신질환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항대립은 강사장이 자신의 기억 속에서 병구를 찾아내는 순간 제시된다. 유제화학 공장에서 일하던 중 산업재해로 5년째식물인간 상태로 있는 어머니에 대한 보상은 이미 이루어졌다는 강사장의 이야기는 ‘자본가/노동자’의 대립항을 제시하고 있다. 병구의 아버지는 자신의 몸을 제외하면 광부였으며, 선생은 수업료를 내지 않는다고 구타를 했으며, 애인은 노동운동 중에 구사대에게 맞아 죽었다. 병구가 찾아낸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바로 외계인이며, 지구/외계의 이항대립을 포괄하는 ‘우주’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표가 된다.
3. 형사들 혹은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
개코형사와 김형사의 등장은 관객으로 하여금 병구의 ‘환상’에서 ‘현실’의 세계로 시야를 돌리게 한다. 개코형사의 감성적 수사와 김형사의 이성적 수사가 결합된 결과에 의하면 병구는 영락없는 연쇄살인범이며 또한 외계인설에 도착된 정신병적 광신도이고 강사장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무고한 시민일 뿐이다. 이는 형사들이 찾은 병구의 소행에 대한 여러 흔적들을 통해서 증명된다. 강사장-형사들의 연결관계는 병구의 환상이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계급투쟁의 선동을 의미하고 있다. 자신을 설득하는 김형사에게 병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데 다 알면서 어디 있었는데. 내가 미쳐갈 때 어딨었어! 니들이 더 나빠.” 외계인 연구를 통해 개인의 비극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구조적 모순이었던 것이라는 것을 이미 간파한 병구가 같은 ‘지구인-노동자’에 하는 충고이다.
4. 지구의 종말 혹은 계급투쟁의 결말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서로 끊임없이 대립했으며,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끝없는 투쟁을 벌여왔는 바, 이 투쟁은 전체 사회의 혁명적 개조로 끝나거나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 끝났다.” 병구는 지구를 지키지 못했고, 억압자인 외계인과 피억압자인 지구인의 대립과 투쟁은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 끝났다. 미쳐가면서까지 싸웠는데 희망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희망하지 않는 자에게 절망도 없다는 것이 이 영화의 결론이 아닐까. 그래서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노래는 ‘Somewhere over the rainbow’이다.
2003년이라.. 까마득하군. 지금은 없어진 모 단체가 부산대에서 그 영화를 틀었다지.
지금은 없어진 모 동아리방에서 한 얘기였다지…
헉; 제가 그 영화를 본 것이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아 그래요? 이거 참 재미있네요.
여성주의 웹링을 타고 들렀어요. 저도 대중예술의 이해란 수업에서 지구를 지켜라에 대해 레포트 썼었는데; 전, 고통의 윤리학이란 부재를 달았는데 재밌게 봤어요
그 웹링에서 탈퇴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중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