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친족호칭에 있어서 '언니'는 여성이 손위 여성을 부르는 말이고, '누나'는 남성이 손위 여성을 부르는 말이다. 작년에 내 주위의 몇몇 남성들이 여성들을 언니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 bean이 '언니'의 의미가 젊은 미혼여성까지 확대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과의 지인들은 어휘의 개신이 빠른 경향을 보여왔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었다. 그런데 최근 그런 사례들을 빈번하게 관찰하고 있다.
사실 '언니'란 단어가 친족관계의 손위 여성을 부르는 통칭으로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 초만 해도 '언니'는 남성들이 손위 남성을 정겹게 부르는 호칭어로 보다 빈번하게 사용된 것 같다. 임꺽정의 『홍명희』홍명희의 『임꺽정』에서는 '꺽정이 언니'라는 표현을 비롯하여 손위 형제에 대한 통칭으로 쓰였던 흔적이 관찰되며, 이해조의 『구의산』에서도 '언니처럼'이라고 쓰고 있다. 오히려 손위 형제를 부를 때 두루 쓰는 말은 '형'이 아니고 '언니'였다고 한다. 이번에는 반대로 의미가 확대된 것인데, '언니'의 의미가 확대된 것은 두 가지 부분에 있어서이다. 여성간에 있어서 연령에 따른 상하관계의 구분이 모호졌다는 것과 남성들 또한 젊은 여성에게 이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
나는 언니네가를 먼저 떠올랐렸다. 확실히 여성주의자들은 서로에 대한 호칭으로 '언니'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이 '언니'들은 젊은 여성은 물론 때로는 초로의 할머니일수도 있고, 아직 성징이 시작되지 않은 어린 여성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케이스는 남성들이 여성을 언니라고 부르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말에는 손위 형제의 호칭어가 성별에 따라 구분(언니, 오빠, 누나, 형)되는데 반해, 손아래 형제를 성별으로 구분지어주는 호칭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들의 '자매애'를 강조하기 위해서 가족호칭어를 차용할 때 적합한 어휘는 언니 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런 이유로 '언니'라는 호칭이 굳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경우는 내가 말하려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아직 충분한 사례를 접한 것은 아니므로 다른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남성들이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정말 아무런 관계도 없는 여성을 '언니'라고 부르는 경우이다. 이에 해당하는 예로 가장 적절한 것이 '저 언니, 몸매좋다'이다. 이 '언니'들은 몸매가 좋거나, 능력이 있어 보이거나… 그렇다. 그녀들의 삶이 실제로 그러한 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성들이 '언니'들을 그렇게 보면 그런 것이다. 그리고 화자인 남성들은 정작 그녀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녀들은 길거리에서, TV에서, 입소문으로 그들에게 발견되어서 군것질 혹은 술안주거리로 소비된다. 사실 왜 친족호칭을 차용하는지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 아줌마들이나 할머니, 어린아이들은 '언니'가 아니다. 성적 매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경우는 그래도 친족호칭을 차용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상점에서 특히 동대문시장과 같이 옷가게에서 판매자들이 여성 고객들을 호칭할 때 사용하는 '언니'이다. 판매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 같다. 가족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친밀감을 부여하려는 목적이리라. 이 경우에도 '언니'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옷이며 장신구와 같은 상품이 그녀들의 몸에 붙는 순간 그녀들은 매력적인 여성이 될 수 있다. 말로만. 이 경우에는 중년의 기혼여성도 구매력만 있으면 동대문에 가서 '언니'가 될 수 있다. 시장에 가면 '아줌마'지만.
친족에 국한된 '언니'가 아닌 새로운 '언니'들은 우리의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몸짱과 얼짱이 난무하고, 신자유주의라는 츠나미에 뒤덮인 21세기 초의 한국사회에서 남성들의 '언니'가 된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남성들의 욕망에 의해 소비되거나 혹은 자본에 의해 소비되거나.
관련링크
아말감님의 “난 너의 언니가 아니어요“
제 글(”섹시즘” 리뷰)에 이 글을 링크했습니다. 트랙백을 보낼까 하다가, 부분적으로만 관계된 것 같아서, 그냥 링크만 해요. (이것 참 애매하네요;;)
근데 글들을 보다 보니 언어학 전공자이신 것 같네요~ 제가 쓴 글이 언어에서의 성차별주의를 주제로 한 책에 대한 리뷰인지라, 제대로 쓴 건지 걱정이 되는군요. ^^;;
저는 아직 안 읽어봤는데, 한 번 읽어봐야겠군요. 언어학의 하위 범주에 '페미니스트 언어학'이 있긴 하지만, 학교에서는 그다지 공부할 기회가 없어요. 사회언어학적 연구에서 젠더에 따른 언어의 차이는 오히려 기존의 편견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는 것 같습니다. 페미니스트 언어학 관련도서는 번역된 문헌도 손꼽을 수 있지만, 그 수준 역시 극악인지라 추천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원하신다면 원서의 경우 두 세권 정도는 추천해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원서라구요…? -_-; 저는 그냥 정해경님의 다음 책을 기다릴래요. ^^;
하긴, 언어학 전공도 아닌데 굳이 원서로 열심히 읽을 이유는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