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적' 베지테리안이 되자.

맥월드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던지는 <수퍼사이즈 미 Supersize Me>에는 이상한 풍경이 반복된다. 이상하다기 보다는 불편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모건 스펄록은 한 달 동안의 대장정을 시작하기 전에 여자친구가 정성껏 차려준 자연식을 먹는다. 몸이 망가지고 햄버거를 먹다가 토하는 일이 발생하는 그 한 달 동안 그는 어머니와 여자친구가가 차려주던 음식을 추억한다. 실험이 끝난 이후 그는 몸을 원래대로 돌리기 위해 다시 여자친구에 의지한다. 물론 채식주의자인 동시에 영양상담사인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남자친구를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백인남성이 거대자본과의 작은 싸움을 시작했을 때, 그녀들이 한 것은 결국 밥상을 차려주는 것 뿐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지난 주 목요일, 그러니까 1월 27일에 엄마에게 1월 31일부터 채식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딱 한 달만 엄마의 도움에 의존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할 줄 아는 음식은 돈까스나 불고기양념과 같은 육류들이 전부이기 때문에 한 달 동안 유예기간을 두고 배우려고 이런 제안을 했던 것이다. 담배와 술과 방탕한(?) 생활로 망가진 내 몸을 아는 엄마는 갑작스런 결심에 의심하면서도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셨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아빠랑 이야기를 하시고는 다음날 '난 신경 안쓸테니 하고 싶으면 알아서 먹으렴'하시는거다. 궁금해서 엄마를 좀 귀찮게 해보니 아빠가 '남자'가 고기를 안 먹으면 사회생활 못 한다고 하시면서 말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남성다움이 부분적으로 육식과 타자의 신체에 대한 통제를 통해 우리 문화에 스며 들어있다'는 캐롤 J. 아담스의 견해가 실체가 되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내 여동생이 고기를 거의 먹지 않던 시절에 우리 집에서는 그녀만을 위한 반찬이 따로 있었다. 내 동생은 여성이고 나는 남성이라는 사실말고는 바뀐 것이 없는데 평생도 아니고 결혼할 때까지도 아니고 단 한 달의 유예기간이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생각해보니 베지테리안이 되겠다는 나의 생각을 들은 지인들 중에 나의 채식을 만류한 남성들은 몇 명 있어도 여성들은 없었다.

부끄럽게도 이번 주에 먹은 여섯 끼 중에 나는 이미 한 번 육식을 했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상태이다. 베지테리안을 결심했으나 엄마를 비롯한 다른 여성-물론, 난 여자친구도 없고 결혼도 안 했기 때문에 엄마 밖에 착취할 여성이 없다.-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을 통해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 내 채식이 단지 건강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타인의 번거로움을 수반하면서까지 강행할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자립적 베지테리안'이 되는 것 뿐이다. 하긴, 언제부터 우리 집이 내가 하는 일에 호의적이었다고… –;

아침에 조금만 더 일찍 일어나서 직접 반찬을 만들자. 밖에서 밥을 먹게 되면 조금만 더 발품을 팔자. 발품을 팔기 위해서 조금만 더 부지런해지자. '자립적 베지테리안'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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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

Comment by 아르
2005-02-02 08:09:17

잘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저는, 채식에 대한 상당한 끌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적극적으로 분석해 보진 않았지만, 'Compassion Over Killing' 라는 단체를 알게 된 후로 약간 더 심해진 것은 사실이더군요. (그렇지만 극단적인 육식 혐오라던가, 거부라던가 하는 방식으로 다가오진 않았으니 저도 참 애매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더군요. 일단 결심을 들어가는 것 부터. 게다가 육식에 너무 익숙하고, 거기에 또 나름대로 즐기는 편이라 더더욱. 신념이 생긴다면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막연한 기분입니다. (만약이라도 집에 채식을 하겠다 선언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궁금해집니다.)

그런 사람으로서 한 사람이 채식을 결심했다는 점에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네, 그저 생각이군요. 특히 한국에서는 더 어려움이 있겠지만, 스스로 결심한 바 지켜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나라는 원래 채식을 하기에 상당히 좋은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 편인데, 어느새 너무 서구화되어 쉽지 않은 환경으로 바뀐 것 같기도 합니다.

아, 위에 말한 Compassion Over Killing 사이트에 가면 채식을 위한 요리 가이드들이 꽤 있더군요. 물론 '서양인을 위한' 이지만요.

 
Comment by 사슴벌레
2005-02-02 15:13:59

저는 알레르기 때문에 채식을 해야했고(육식을 금지당했고) 아직도 온전한 채식주의자는 아니예요. 그래서 집밖에서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은 모르지만, 집에서 식사하실 땐 '쌈'이 좋을 거예요. (양)배추, (적)상추, 깻잎부터 쑷갓이나 미역, 신선초, 청경채, 겨자채, 치커리, 케일… 요즘에는 마트에서도 종류별로 원하는 만큼만 팔더라구요. 한 봉지에 원하는 채소들을 담고 계산을 하면 이천원 안팍(물론, 그때 그때 달라요;;;)인데, 혼자서 네끼는 먹어요. 특별히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되고 맛도 좋지요. 여유가 돼서 오이나 파푸리카, 풋고추(얘네는 비싸요;;;)를 함께 먹는다면 환상적. 어머니께는 맛있는 쌈장과 된장찌게 만들기만 전수받으면 되죠. 군침이… 쓰읍. 자립의 성공을 빌어요!

 
Comment by suksim
2005-02-03 19:19:11

아르// 소개해주신 사이트는 조만간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그런 레시피들보다는 일단 제대로 된 칼질부터 배워야 할 듯 하네요. –; 사실 전 풀종류는 다 싫어하는 극도의 육식선호였는데, 쌈 싸먹는 것도 나름 맛있더군요. 아르님도 한 번 시도해 보세요.
사슴벌레// 쌈 종류가 아마 저의 희망이 될 듯 합니다. 좋은 조언 감사드려요. 근데 청경채나 신선초는 그렇다치고, 겨자채의 정체가 심히 궁금하군요. 설마… 겨자맛이?

 
Comment by 가디록
2005-02-03 20:34:43

음…그래서 사람들이 베지테리안이라고 하면 레즈비언을 떠올리는 것이었군요=_=
저 역시 아르님과 마찬가지로 채식에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전에 수업 들었던 교수님이 굉장히 매력적인 분이었는데 채식주의자이셨거든요.오호호

 
Comment by 달군
2005-02-04 01:27:31

겨자채 맛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면. 약간 매운맛도 있고 많이 맵던가? :)그러나 저러나 이글을 보니 더 멋지군요. 자립적 베지테리안이라니!

 
Comment by suksim
2005-02-04 02:50:57

가디록// 그 명제의 역 또한 참이라는 보장이 있나요? –;
달군// 오… 전 겨자채랑은 친해지기 힘들듯. 매운건 싫어요. 자립적 베지테리안은 아침을 굶는 것으로 결정되었다는 소문이…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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